부추실, 박 대표는 3․1운동 제91주년을 맏이하기 위해서 서울시내 유적지를 답사하기로 하였다. 2010년 2월 28일 10시 안국역 1번 출구에서 국학연구소 임원들과 모여서 서울 종로구 계동에 중앙고등학교 내에 3․1 독립관(당시 숙직실터)를 찾았다.
<중앙고보 숙직실터>
이 장소는 1919년 3․1 만세운동을 실현하기 위해서 동경유학생 송계백이 현상윤, 송진우와 만나 2․8독립선언서를 전달하고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곳이다.
계동 중앙고등보통학교 숙직실은 1919년 1월중 일본 동경 유학생 송계백이 중앙하교로 교사 현상윤과 교장 송진우를 방문하여, 유학생들의 거사 계획을 알리고 ‘2․8독립선언서’ 초안을 전달함으로써 3․1운동의 도화선을 놓은 장소다. 또한 2월 초 최린, 최남선, 송진우, 현상윤 등이 최린 집에서 회합을 가진 2,3일 뒤에 모여 독립운동 거사를 숙의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김성수 숙소터>
기독교계 지도자 이송훈이 송진우를 만나 천도교측의 거사 제의를 받고 3․1독립운동의 일원화 문제를 처음 논의한 곳이다.
1919년 2월 초순 재동 최린의 집과 계동 중앙고보 숙직실에 독립운동 거사를 모의하기 시작한 최린,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로 처음에 박영효, 윤용구, 한규설, 김윤식 등 대한제국 시절 요직에 있었던 명망가들을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것이 여의치 않자 천도교계와 기독교계를 중심으로 거사를 추진하기로 하고, 최남선이 나서 평안도 기독교계의 지도자로 활약하던 이승훈과 접촉을 시도하였다.
1919년 2월 11일 최남선의 편지를 받고 급거 상경한 이승훈은 김성수의 숙소인 계동 김사용의 집에서 최남선을 대신해 나온 송진우와 만났다. 이 자리에서 송진우는 이승훈에게 독립운동 거사계획을 알리고 기독교 측의 참가를 요청하며 동지 규합을 위해 당일 평안북도 선천으로 돌아갔다. 이처럼 계동 김성수 숙소는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의 간접적으로나마 송진우를 매개로 첫 접촉을 갖고 톡립운동 일원화의 계기를 마련한 장소이다.
<유심사>
3․1운동 당시 만해 한용운이 머무르며 불교잡지 (惟心)을 발행하던 곳으로 불교계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
1919년 2월 24일 천도교 측과 기독교 측 사이의 독립운동 일원화가 성사되자,최린은 계동 유심사(惟心社)로 한용운을 찾아와 거사 계획을 설명하고 설명하고 불교계의 참여를 확약 받았다. 이후 한용운 합천 해인사 출신 승려로 서울 대각사에 머무르던 백상규 (법명 용성)를 불교계 민족대표로 참여시키는 한편, 2월 28일 밤 중앙 학림 학생 신성완 백성욱, 김대용, 오태인, 김법린, 박민오등을 유심사로 불러 각처에 배포한 독립 선언서 3천매를 전달 하였다.
<손병희 집터>
3․1 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들이 상견례를 겸해 모여 독립선언서 장소와 절차 등에 대해 의견을 나는 곳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3인은 3․1운동 거사 전날인 1919년 2월 28일 서로 지면을 익히고 다음날 독립선언식 절차를 최종 점검하기 위해 가회동 손병희(1861~1922)의 집에 모였다. 이 자리에 참석한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식 장소인 탑골 공원에 학생들이 집합하기로 되어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만일의 사태를 우려해 급히 선언식 장소를 명월관 지점 태화관으로 변경하였다. 그로인해 기사 당일 일정에 다소 혼선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강기덕 숙소터>
3․1운동 때 민족대표 48인의 한 사람을 활약한 학생단 대표 강기덕이 독립운동 거사를 준비하며 시내 중등학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세력을 규합한 곳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1886~7)은 대관원모임 이후 1919년 2월 초순경부터 서북학생친목회 등의 인맥을 통해 경성고보 김백평, 박노영, 중앙고보 장기욱, 선린상업 이규송, 보성고보 장채극, 전옥영 등 시내 각 중등학교 학생들은 안국동 자신의 집에서 숙소로 불러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강기덕은 자신의 하숙방에 불러 모은 중등학교 학생들에게, “민족자결 주의에 입각해 조선의 독립을 얻어내려는 움직임이 지식층 사이에 진행 중인데, 그것을 실행에 옴기기 위해서는 학생들이 맡아야 할 역할이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거사에 대비해 사전에 세력을 결집하며 준비할 것을 당부 하였다. 이렇게 규합한 중등하교 학생들은 3․1운동 과정에 일선 행동대로서 독립선언서와 각종 격문을 배포하고 시위를 주도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옛 천도교 중앙총부터>
3․1운동 당시 천도교 측의 유력한 거사추진 거점 가운데 하나였던 곳
『최린 자서전』에 따르면 민족대표의 선정을 비롯한 천도교 측의 독립운동 거사준비는 손병희의 지도 아래 권동진, 오세창, 최린 3인이 수시로 회합하여 추진했다고 하는데, 그 주요 거점 가운데 하나가 송현동 천도교 중앙총부였다. 김양선의 논문에는 1924년 2월 24일 기독교측 대표 이승훈과 함태영이 천도교 총부로 찾아가 천도교측과 합동으로 거사를 결행하기로 방침을 결정했다고 알리자,손병희가 최린을 불러 함태영과 함께 구체적인 절차를 논의토록 지시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근거자료가 명확치 않아 정확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기는 어렵다.
<경성서적 조합 사무소 터> - (조선 독립 신문 ) 인쇄지
3 ․ 1운동 직후 독립운동의 진상을 알리는 (조선 독립신문 ) 2,3,4,호 를 인쇄 한고
보성사에서 (조선 독립 신문) 창간호를 인쇄한 1919년 3월 1일 당일 발행인 윤일선 이 체포되자, 신문 발행을 주관하던 천도교 월보사 주필 이종린은 관훈동 155번지 경성 서적 조합 사무소로 장소를 옮겨 장종건 임승옥 ,김영조,와 함께 비밀리에 등사판으로 (조선 독립 신문 )제 2,3,4,호를 인쇄하였다.(조선독립 신문)은 3월 10일 이종린이 체포된이후 장종건 등 계승하여 광화문통 85번지 유병륜의 집에서 제5,6,7,호를 발행하고, 이어 경기도 군 용강면 공덕리 195번지 ( 현 마포구 )남치훈의 집에서 제 8,9,.호를 발행하였다.이 사실이 일제 경찰에 탄로나 3월 25. 장동건 최치환이 체포되었지만 이후로도 ( 조선독립 신문)은세브란스 의전 이용선 그룹을 비롯한 다양한 계통을 통해 지속적으로 발행 되었다.
<이종일 집터> - 3 ․ 1 독립선언서 배 포 지
3 ․ 1운동 당시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 선언서를 비밀리에 운반해 각처로 배포 한 곳
3․ 1운동 민족대표에 대한 ‘예심 종결 결정 ’에 따르면,보성사 사장 이종일 (1858-1925)은 1919년 2월27일 보성사에서 인쇄한 독립선언서 약 2만여 매를 비밀리에 자신의 집으로 운반 해보관 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기독교 측의김창준과 함태영, 불교측의 한용운등에게 교부하고, 천도교 인맥을 통해 전국 각지의 천도교구에 배포함으로써 전국적인 독립만세의 발판을 놓았다.
< 보성사 터>
1919년 3 . 1운동 이전 「독립선언서」를 인쇄하고,3월 1일 (조선 독립신문) 제1호를 발간한 곳.
보성사는 대한제국 궁내부 내장원경 등을 역임하며 고종의 측근으로 활약하던 이용일 (1854-1907)이 1906년 아어(俄 語 :러시아)학교 자리에 보성중학교를 설립하면서 교재 출판을 위해 학교 구내에 설치한 인쇄소였다. 보성중학교 와 보성사는 이용익 사후 재정난으로1910년 천도교로 경영권이 넘어가 3 ․ 1운동 당시 최린이 보성고보의 교장을,이종일이 보성사 사장을 맡고 있었다. ‘예심 종결결정’에 2월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 2만 1천매를 인쇄하고, 3월 1일 당일 천도교월보사 주필 이종린 주관 하에 독립선언에 호응하여 궐기할것을 촉구한 (조선독립신문) 제1호(발행인 윤일선)를 찍어낸 곳이다.
<태화관 터>
1919년3월 1일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모여 독립선언식을 거행한 곳
1919년 3월 1일오후2시,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29인은 요리점 태화곤에 모여 독립선어식을 갖고,한용운의 선창으로 대한독립만세를 부른뒤전화를 받고 출동한 일제경찰에 연행되었다.
태화관 터는 본래 반정으로 왕위에 즉위하기 전 인조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으로 이후 아동 김씨 김홍근의 저택,헌종의 후궁 경빈 김씨의 순화궁으로 그 주인이바뀌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을 강점할 무렵에는 이윤용 ,완용 형제가 번갈아 차지해 살면서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 뒤 명월관 분점 태화관이 자리 면서 3 ․ 1운동을 맞았고, 이후 감리교에서 구입하여 태화여관으로 사용하였다.
현재 이 자리에세워져 있는 태화빌딩은 태화 기독교 사회복지관의 회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승동교회>
3․ 1운동 준비과정에서 제1,4회 학생단 간부회의가 열린 장소로,학생단 독립운동의 거점.
승동교회는 연희전문 출신의 학생단 대표 김완벽(1894-1928)이 다녔던 교회로,3 ․ 1운동 준비과정에서 1919년 2월 20일 학생단제 1회 간부회의를 열어조직 체계를 정비한 곳이다. 2월28일에는 제 4회학생단 간부회의가열려 학생조직 동원을 최종 점검하고 독립선언서 배포 등과 관련한 역할을 분담함으로써 이튿날 탑골 공원에서의 독립선언식을 시발점으로 하는 거족적 독립만세운동의 발판을 놓았다.
승동교회는 1893년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무어(1860-1906)가 지금의 롯데호텔 부근곤당골에 세운 교회에서 비롯 되었으며,1905년종로 피맛골 뒤편 지금의 자리로 옮기며 ‘ 이름을 갖게 되었다.’ 승동교회’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 교회 는 대가집 소실 (小 室)들과 장인, 백정들이 모여 들이 ‘첩장교회’란 별명이 붙은 당시의 대표적인 민중교회 였다.
<탑골공원>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이 운집한 가운데 독립선언식을거행한 장소
3 ․ 1운동 전날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들이 사전 연락도 없이 일방적으로 독립선언식 장소를 태화관으로 변경한 사실을 확인한 학생 대표들은태화관을 항의방문한 뒤 당초 예정 했던 탑골공원에서 3월 1일 오후 2시 같은시간에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 하였다.학생대표가 팔각정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자,학생들은 태극기를 꺼내 흔들며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고 공원을 나서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이때 종로를 거쳐 덕수궁 대한문에 이르는 길의 수많은 군중들이 시위 대열에 합류함으로써 만세시위는 대대적인 독립운동으로 발전 하였다. 3 ․ 1운동 의 거족적인 독립 만세 시위는 이렇게 탑골 공원에서 점화도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10층 석탑이있어 탑골이라는 이름이 붙은 탑골공원은 본래 원각사라는 절이 있던곳으로 ,대한제국기에 서울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조성되었으며, 3 ․ 1운동의 발화지로 역사의 큰 자취를 남겼다.
대한문 앞 및 선은전 광장 3 ․ 1 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3월 1일 탑골 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거행한뒤, 오후 3시경 고종 황제의 빈전이 마련된 덕수궁 대한문 앞에모여 독립만세를 부르고 연설을 한 시위대의 일단은만세를 부르면 장곡 청정(현 소공로)을 거쳐 남산 조선 총독부를 향해 행진하였다. 행열이 조선은행 (현 한국은행)앞에 이르자 학생과 시민이 합류하여 인파가 3천명 으로 늘어 났다. 시위대는 총독부를 향해 본정통 (현 충무로)으로 들어서며 이를 저지하는 일제 군경과 맞섰다. 이부는 저지선을 뜷기도 했으나,용산 조선군 사령부에서 보병 3개 중대와 기병1개 소대를긴급히 추가 배치함으로서 시위대는 강제 해산되었다.
제 1 장 3 ․ 1 독립운동의 배경
1.일제의 한국 병탄과 식민지 무단 통치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소위 ‘정한론 ’(征韓論)이후 이미 19세기 중엽부터 근대국가의실력을 기르면서 기회만 있으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화 하려고 단계적으로 끊임없이 침략정책을 강화해 오다가 ,190511월 ‘을사 5조약’을 강제 체결하여 한국의 외교권 등 국권의 일부를 빼앗고,1910년8월에는 그들의 강대한 무력으로 한국민족의 피어린 저항투쟁을 압살한후 마침내 한국을 일제의 ‘식민지’로 병탄 하였다.
2. 1910년대 3 ․․ 1운동 이전의 독립운동
한국 민족은 일제의 이러한 잔혹한식민지 무단 통치와 야수적 탄압과 민족 말살 정책과 식민지 수탈 정책에 대해서 온갖 방법으로 분투하였다.
▲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은 어떻게 진행 되었나?
▲국외에서의 항일 운동은 어떻게 진행 되었나?
만주.노령. 상해. 일본. 미국등
한국 민족은 1910년 8월 이후 의 이러한 독립운동 세력들이 불굴의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1914년 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1918년 종전이 가까워오자 국세정세의 대변동이한국민족 독립운동에 미칠 영향을 예리하게 관찰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제 2장 3 ․ 1 독립운동의 태동
3 ․ 1운동을 태동시키고 처음에 기획하여 하나의 대규모 독립으로 합류케한 독립운동으로 세력에는 다음과 같은 7개의 세력의 후름이 있었다.
1. 신한 청년단(新韓靑年團)의 독립 운동
김규식은 파리 평화회의에 출발에 앞서 신한 청년단으로부터 다음 12개 항목에cml 임무를 수행토록 지시를 받았다.
(1)평화회의에 출석한 각국대표들을 면접하고 한국의 동정과 지지를 얻으것.
(2)파리에 비공식적 으로 가 있는 유력한 인사들과 면접할것.
(3)일본 무단 통치 하의 한국의 정치, 경제 및 종교의 여러 가지 사정을 알릴 것.
(4)일본의 한국에 대한 야욕을 폭로 할것.
(5)일본의 몽고, 시베리아.산등(山.東 )양자강 지역, 복건. 테국.필리핀.남해 및 인도에 대한 야욕을 폭로 할것
(6)한국은 극동 문제를 해결하는데 있었서 열쇄와 같은 중요한 위해 있다는 것을 역사적, 지리적 및 전략적 이유를 설명할것
(7) 미국, 영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유력하고 책임성 있는 신문기자들의 동정적인 협력을 얻어 한국독립에 대한 세계적인 여론을 조성할것.
(8)미국,영국.이탈리아.중국의 유력한 신문들을 통하여 전세계에 한국사정을 알리고,세계의 정치가들, 외교 지도자들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한구에 대한 동정적 여론 조성 할것. ,
(9)파리,런던,샌프란시스코,상해 등지에 홍보국을 설치하고,또 모든 방법을 통하여 직접 간접으로활약 할것. 세계의 정치가들과 외교지도자들,그리고 각국 국민들간의 여론이 어떻게 돌고 있는지를 그동 알릴 것.
(10)선전물, 선전작품 그림이 든 전단등을 작성하여 반포 할것 .
(11) 왜 한국이 독립해야하는가에 대한 이유를 설명하며,한국사람이 자치할능력이 있다는 것을 과시 할것.
(12)평화회의에서 대표로 인정 받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고,한국해방에 데한 정식 청원서 를 제출할것. 이 청원서를 자세하고 포괄 적일 것.
2.만주와 노령지방의 독립운동.
3.미주(미주)지방 독립운동.
4.재일본 유학생들의 2.8 독립선언.
제 3장 3․ 1 독립 선언의 준비
1.독립선언서( 獨立宣言書 )작성.
2.독립 선언서의 인쇄
3.독립선언서의배포.
4.민족 대표의 선정.
5.거사일자(居士日字 )의 결정.
제 4장 3 ․ 1운동의 전개
1.독립의 선언
2.독립만세 시위의 시작.
3.국내전개
4.국외 전개
제 5장 3 ․ 1 독립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제 6 장 3 ․ 1 독립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참고문헌 :신용하 저 「3.1 독립운동」